장례식장에 다녀오는 내내 생사여탈권에 대해 생각했다. 여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누워있는 어떤 죽음 앞에 생사여탈권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어렴풋하기만 한걸까. 너무 오래된 개념이라서, 이제 쓰이지 않는 권력이라서,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 것일까. 근데 공권력의 위법과 과잉으로 누군가 죽게된 것과 누군가를 살릴지 죽일지 결정을 하는 권력의 결은 약간 다른 것 같은데. 어쩌면 우리는 앞의 상황만 생각하며 사과와 대책을 요구하고 있고, 권력은 스스로의 당연한 권력행사에 만족하기 때문에 염치도 사과도 없이 자기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 그랬지, 정치는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라고. 언젠가의 정치는 누구의 권리는 제한하고, 누군가의 권리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정치는 경제적 이익 사이의 분할선 정하기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은, 저울의 한 쪽 끝에는 누군가의 이익이 놓여있지만, 반대쪽 끝에는 누구들의 생명이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명과 이익을 한 저울에 올려놓고 관리하는 것이 지금의 정치이다.
이 사회를 이 사람들을 이 자원들을 우리가 잘 관리해야 될텐데. 전기 좀 만들어 공장도 돌리고 돈 좀 만져볼까. 그러자면 핵발전소 좀 지어야하는데, 지으려거든 경주에 지어라. 사고가 나도 거기 사람들이 죽거나 힘들거나 하겠지. 송전을 하려거든 밀양으로 보내라. 거기 사람들이 싫어하겠지. 좀 시끄럽던가 말던가. 쌀값이 싸야 생활임금도 최저임금도 싸게 유지하고 우리들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지. 쌀 좀 수입하고 그 덕에 자동차도 팔고. 농민들은 어차피 없어지고 있는데. 다른 거 하던가 말던가. 비가 많이 와서 한강이 넘칠랑 말랑 한다며. 팔당댐에 최대한 담수 유지해라. 그 동네 범람해서 몇몇 죽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방류해서 압구정 넘치는 것보다는 낫잖아.
언젠가 왕의 봉인장에 들어있던 생사여탈권과는 좀 다르지만, 관리한다는 것도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지 결정하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생사여탈권은 훨씬 더 은밀하고 광범위하다. 관리의 한 쪽 끝에서 어떤 집단의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다. 누구라고 특정한 것은 아니잖아. 이 결정 때문에 그 죽음이 있었다고 드러나 보이는 것도 아니잖아.
의학이 독점하고 있는 사망진단서의 병사와 외인사라는 선택지는 이미 많은 것을 은폐한다. 광화문에서 대학로까지 317일 동안 진행된 이 죽음의 이름은 "관리사 / 관리에 의한 죽음" 이다. 권력의 눈으로 보기엔 있을 수도 있는 죽음 / 너무 당연한 죽음인데, 시끄러우니까 부검을 통해 이 죽음은 병사라고 선언해 버리자. 우리는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는데, 아무런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없는데. 거기 떠드는 사람들 좀 조용히 하세요.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2016-10-03 20:54:16